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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없이 떠난 '고문 기술자' 이근안, 역사의 심판 앞에 서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 기술자' 이근안 씨가 88세로 사망했다. 그는 1987년 민주화 이후 12년간 잠적했다가 1999년 자수해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출소 후 20년간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의 암흑기를 상징하는 인물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이근안 씨가 지난 25일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한 개인의 생을 마감하는 것을 넘어, 권위주의 시대의 국가폭력과 그에 대한 책임 문제를 다시금 조명하게 한다. 고문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그가 남긴 역사적 상처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 한 마디 없이 떠난 것에 대한 분노와 허전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이근안 씨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근무하던 시절 독창적인 고문 기법들을 개발하고 완성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손은 솥뚜껑처럼 컸으며, 그 손으로 피해자의 팔을 잡아당겨 관절을 뽑았다가 다시 밀어 넣는 '관절 뽑기'가 그의 주특기였다. '날개 꺾기', '통닭구이' 등으로 불린 고문 기법들도 그가 개발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간첩 혐의로 억울하게 고문받았던 납북어부 김성학 씨는 "이 씨가 상대의 신체 반응을 봐가며 고문 강도를 세밀하게 조절해 고통을 극대화시켰다"고 증언했다. 이근안 씨는 이러한 고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라는 궤변까지 내놓았으며, 전국으로 '출장 고문'을 다니며 특진을 거듭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12년간 잠적했던 이근안 씨는 1999년 검찰에 돌연 자수했다. 그가 자수를 결심한 이유는 함께 고문을 저질렀던 동료 형사들이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받은 것을 보고 심경의 변화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다만 대부분의 고문죄가 공소시효를 넘긴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납북어부 사건으로만 기소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2005년 복역 중이던 이근안 씨를 찾아간 고문 피해자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어디 개인의 잘못입니까. 시대가 만든 죄악이지"라며 그를 용서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김 전 장관은 훗날 회고록에서 "나의 용서가 진실인지 반문하곤 한다"고 적었으며, "고문당했던 기억이 떠오를 게 분명해 면회 가던 날 오전까지 망설였다"고 고백했다.

이근안 씨는 2012년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이란 제목의 책을 출판하며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피해자들에게 "사과한다"고 언급했으나, 그 사과의 내용은 피상적이었다. 기자가 정확히 무엇에 대해 사과하느냐고 묻자 그는 "쥐어박으면 안 되는데 그게 내 잘못"이라고 답했다. 이는 고문 행위의 심각성을 외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근태 전 장관이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전기 고문을 당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다"고 증언했고, 이근안 씨의 고문으로 인해 옥사한 피해자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행위를 '쥐어박는다'는 수준의 표현으로만 축소했다.

이근안 씨의 사망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장을 마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 남겨진 상처는 여전히 살아 있다.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던 김근태 전 장관은 파킨슨병을 앓다가 64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근안 씨의 고문으로 인해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던 피해자들은 30년, 40년이 지나서야 누명을 벗을 수 있었으며, 당사자가 이미 세상을 뜬 경우도 적지 않다. 이근안 씨는 1999년 출소 후 사망하기까지 20년 동안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없었다. 피해자들이 힘들게 내민 용서의 손길에도 진정한 반성과 사과 없이 떠난 그에게는 '고문 기술자'라는 낙인이 역사의 형벌로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