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중동 파병 요청에 정부 '전략적 모호성' 유지… 국회서도 신중론 우세
정부가 미국의 중동 파병 요청에 '전략적 모호성'으로 대응하는 가운데 국회에서도 파병에 대한 신중론이 우세를 보였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구체적 입장 표명을 회피했고,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공식 요청이 없었다고 명확히 했으나 내부 검토는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조현 외교부 장관과 안규백 국방부 장관이 17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와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동 파병 요청에 대해 극도로 신중한 입장을 드러냈다. 조 장관은 "현재로서는 파병 자체에 대해 미국과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 곤란하다"며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했고, 안 장관도 "국익과 국민안전, 법률 등에 따라 결정될 사안"이라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반복했다. 이는 한·미동맹, 이란과의 관계, 교민 안전 등 복잡한 외교 상황을 고려한 정부의 신중한 태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 장관은 전날 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과의 통화 내용에 대해 "중동 정세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고, 우리 국민 수송과 관련한 미측의 협조에 사의를 표했다"고 설명했다. 루비오 국무장관이 호르무즈해협에서의 항행 자유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협력 필요성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다만 조 장관은 이를 명시적인 '파병 요청'으로 단정하는 데는 선을 그었다. 더불어민주당 윤후덕 의원이 "요청이 없었다면 없다고 하면 될 텐데 그렇게 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추궁했을 때, 조 장관은 "문서 형태의 요청이 없다고 해서 요청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며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조 장관은 "대외적으로는 일정 수준의 모호성을 유지하고, 대내적으로는 국익 중심으로 헌법과 절차를 준수하겠다"고 밝혀 '전략적 모호성'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안 장관은 조 장관과 달리 "공식적인 파병 요청은 없었다"고 명확히 답변했으나, 공식 요청이 올 경우에 대비한 내부 검토는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안 장관은 공식 요청의 기준을 "문서나 양국 장관 논의 등"이라고 설명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소셜미디어(SNS)에 남긴 파병 요청 의사는 "공식 요청으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했다. 안 장관은 지난 2일 엘브리지 콜비 미 국방부 정책차관과의 통화에서 호르무즈해협 관련 이야기는 없었다고 덧붙였으며, 청해부대의 아덴만 해적퇴치 임무를 실질적 전쟁상황 투입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입장도 함께 제시했다.
국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파병에 대한 신중론이 우세했다. 더불어민주당 김상욱 의원은 "자칫하면 위헌 소지로 이어질 수 있고 우리 군과 국민의 안전 문제와도 직결된다"며 "이란과 적대 관계로 비화될 경우 우리 선박과 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국혁신당 김준형 의원도 "국제법적 논란이 있는 사안인 만큼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며 파병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민주당 홍기원 의원은 파병 절차 문제를 제기하며 "해외 파병은 헌법상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사안"이라고 지적했고, 행정적 방식으로 우회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해외 언론은 한국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블룸버그 오피니언의 카리시마 바스와니 칼럼니스트는 "한국은 미국의 우선순위가 바뀌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며 최근 사드(THAAD) 시스템 일부의 중동 이전 등이 한·미동맹의 신뢰 기반을 흔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바스와니 칼럼니스트는 "한국은 사드 배치 이후 중국으로부터 경제적·외교적 보복을 수년간 감수했는데, 이번 사태는 그 희생이 헛된 것이었는지 한국이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과 신뢰에 대한 의구심이 깊어지면 독자적 핵무장을 지지하는 한국 내 여론이 커질 수 있다고 전망하며 미 정부가 한국에 다시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