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반도체 수요 급증으로 핵심 소재 CCL 가격 74% 폭등
AI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수요 폭증으로 PCB 핵심 소재인 CCL 가격이 톤당 2만달러를 돌파해 전년 대비 74.5% 급등했다. 공급 부족으로 기업들이 선발주를 서두르고 있으며, 납기는 6개월 이상 지연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인공지능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수요가 폭증하면서 인쇄회로기판(PCB)의 핵심 소재인 동박적층판(CCL)이 사상 초유의 공급 부족 사태를 맞이했다. 수도권의 한 PCB 제조업체 대표는 최근 대만의 동박적층판 생산업체인 EMC와 TUC에 100억원어치 물량을 선발주했다. 이는 평소 한 달 평균 사용 물량인 15억~20억원의 5배를 넘는 규모다. 이 대표는 "20년 넘게 PCB 사업을 하고 있는데 CCL이 없어 제품을 못 만드는 상황은 처음"이라며 공급난의 심각성을 호소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동박의 난"이라 부르며 시장의 이상 신호를 감지하고 있다.
CCL 가격 급등은 통계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 3월 CCL 수입 단가는 톤당 2만728달러로 집계되어 전년 동월(1만1880달러) 대비 74.5% 상승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CCL 수입 단가가 톤당 2만달러를 넘어선 것이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0년 이후 처음이라는 것이다. 수출 단가도 마찬가지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달 CCL 평균 수출단가는 3만998달러로 1년 전보다 65.2% 급등했다. 이는 단순히 원재료 가격 상승을 넘어 전 산업 공급망의 구조적 변화를 의미한다.
CCL 수요 폭증의 근본 원인은 첨단 산업의 동시다발적 성장에 있다. 엔비디아의 블랙웰 같은 최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에 들어가는 고급 PCB 수요가 급증했고, 5·6세대 통신 인프라, 자동차 자율주행 시스템, 데이터센터 서버 등 여러 산업에서 고사양 CCL 사용량이 동시에 늘어났다. 국내 공급망은 동박 공급사(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SK넥실리스), CCL 제조업체(두산, LG화학), PCB 기판 제조업체(삼성전기, 대덕전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부가가치 제품 수요에 맞춰 생산라인이 속속 전환되고 있다. 특히 고급 소재인 T글래스를 쓴 CCL이 대형 반도체에 사용되면서 E글래스 기반 CCL을 사용하는 중소 PCB 업체들이 원재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CCL 관련 기업들의 실적과 주가는 고공행진 중이다. 블랙웰에 CCL을 단독 공급하는 것으로 알려진 두산의 주가는 2024년 4월 말 15만2300원에서 지난달 말 159만6000원으로 2년간 10배 이상 상승했다. 같은 기간 삼성전기는 5.3배, 대덕전자는 4.8배 상승했다. 이처럼 첨단산업 공급망에 속한 기업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문제는 이 같은 호황이 선택적이라는 점이다.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생산이 재편되면서 범용 PCB를 생산하는 중소 기업들은 원재료 확보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공급난으로 인한 업계의 고통은 심각하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주문 후 한 달 정도만 기다리면 원하는 물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최소 6개월 이상 기다려야 물량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일부 반도체 장비업체는 납품 일정을 앞당기기 위해 선박 대신 항공으로 제품을 운송하는 방안까지 추진 중이다. 환율과 유가 상승까지 겹치면서 제품값뿐 아니라 운송비도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 한 관계자는 "기존 거래처뿐 아니라 중국 공급처까지 확보했지만 최근 잇달아 납기 지연 통보를 받았다"며 "뾰족한 대책이 없어 막막하다"고 호소했다.
CCL 공급난은 단순한 원재료 부족을 넘어 산업 생태계의 불균형을 드러내고 있다. AI와 데이터센터 같은 첨단산업이 필요로 하는 고사양 CCL에 공급이 집중되면서, 범용 PCB를 생산하는 중소기업들이 구조적으로 소외되고 있다. 선발주 주문이 늘어나는 것도 이러한 불안감의 표현이다. 업계는 공급 정상화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공급망 재편과 산업 구조 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