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통일 대상'에서 '국가'로 재정의해야
정부가 주최한 평화전략 자문단 회의에서 전문가들은 북한을 통일 대상이 아닌 독립 국가로 인정하고, 주권 차원의 국제관계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남북연합이라는 명확한 목표 설정과 주변국 활용을 통한 우회 전략을 강조했다.

북한을 더 이상 민족 공동체의 일부로 보는 '통일 대상'이 아니라 국제법적 주권을 가진 독립 국가로 인정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제기됐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13일 서울 종로구 남북회담본부에서 개최한 '한반도 평화전략 자문단' 3차 회의에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권만학 경희대 명예교수, 박명림 연세대 교수 등 16명의 정책 전문가들이 급변하는 한반도 안보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대북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촉구했다. 이는 북한이 지난달 9차 노동당대회에서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로 사실상 공식화하고, 미국·이란 갈등 심화 등 국제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나온 현실적 진단이다.
정세현 전 장관은 북한이 남한의 교류 제안을 '흡수통일'로 의심하고 있다며,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명확한 최종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북연합이라는 구체적인 종착역을 밝혀야 한다고 제언했다. 남북연합은 1989년 노태우 정부가 발표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서 제안한 개념으로, 남북 화해협력-남북연합-통일 국가로 이어지는 3단계 구조를 의미한다. 한국과 북한이 각자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공동 기구를 운영하는 방식이 현실적 대안이라는 분석이다. 정 전 장관은 당장 화해나 교류가 어렵다면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되 충돌을 방지하는 '좋은 담장'과 '차가운 평화'를 정책의 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가운 평화는 군사 충돌을 방지하고 제한적으로 접촉하면서 평화를 유지하는 개념으로, 현재의 남북 관계 현실을 반영한 전략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을 국가 수준에서 인정하는 것이 교류 협력의 전제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권만학 명예교수는 교류 협력은 주권 인정 이후의 후속 전략이지 입구 전략이 아니라며, 체제 인정을 넘어 주권 인정과 영토 보전 등 국가 수준의 주권을 인정하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수라고 밝혔다. 박명림 교수는 과거 김대중 정부가 내부적으로 '두 독립 국가'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북한의 실체를 인정했던 사례를 언급하며, 주권을 인정하는 '소극적 공존'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도경옥 충남대 교수는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과 한국의 '특수관계론'이 병립할 수 있도록 유연하게 관리해야 한다며 과거 동서독의 사례를 제시했다. 동서독은 1972년 기본 조약 체결 당시 국가 인정 문제를 둘러싼 입장 차이를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채 각자의 해석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타협했던 것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비핵화 문제가 독일 사례와 한반도의 결정적 차이라고 지적했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부원장은 비핵화가 당장 어렵다면 정책 목표를 '핵 폐기'에서 '전략적 안정성 확보'로 전환하고, 평화체제를 통해 비핵화를 견인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북한은 지난달 9차 당대회에서 '발전권(경제)'과 '안전권(핵)'을 양대 개념으로 정식화하며 경제적 자신감을 드러냈다. 과거 김정일 시대의 '사탕알은 없어도 총알은 있어야 한다'는 구호에서 벗어나, 이제는 '사탕도 총알도 다 있어야 하며 우리는 결심하면 무엇이든지 모두 만들어 낸다'는 자신감으로 승화됐다는 평가다. 이는 북한이 경제적 자립력을 키우면서 남북관계 의존을 줄이고 대외 관계를 확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북한과의 직접 교류보다 주변국을 활용하는 우회 전략을 제안했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민족 문제가 아닌 대외관계로 격하한 상황에서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취지다. 한국은 러시아와의 보건·환경협력으로 북한의 참여를 유도하고, 중국 한반도사무 특별대표인 류샤오밍과의 만남으로 교류를 이어가는 등 북한 교류국과의 프로토콜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미·일 동맹의 역할 분담이 재조정되는 상황에서 일본의 외교적 자율성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됐으며, 향후 대북 협상 채널에서 일본의 역할이 커질 수 있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자문단은 이날 논의된 제언들이 실질적인 정책으로 구체화돼야 한다는 점에 입을 모았다. 이혜정 중앙대 정치학과 교수는 미국과 중국 모두 한반도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도 의지도 없다며, 주변국의 속도에 맞추는 '페이스메이커'에서 우리가 평화를 주도적으로 설계하는 '피스메이커'로 넘어갈 때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