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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 연기인생 마감한 배우 최불암, '국민 아버지'로 남기다

한국 방송 역사의 거장 배우 최불암이 29일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수사반장'과 '전원일기' 등을 통해 '국민 아버지'로 자리 잡은 그는 67년간의 연기인생 동안 한국인의 얼을 표현해왔으며, 45년간 소외아동 후원으로 결연 문화를 정착시킨 선한 영향력의 인물이었다.

배우 최불암이 29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구부정한 뒷모습만으로도 시청자의 마음을 흔들었고, '파하~' 하는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시름을 날려버렸던 그는 한국 방송 역사에서 '국민 아버지'의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3월 허리디스크 악화로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14년간 진행해온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에서 하차했으며, 최근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생을 마감했다.

최불암은 1967년 KBS 특채 탤런트로 데뷔한 후 67년간 연극, 드라마, 영화 무대를 누비며 한국 연기의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스무 살에 연극 '햄릿'으로 데뷔한 그는 드라마 130여 편과 영화 90여 편, 연극 50여 편에 출연했다. 특히 1971년부터 1989년까지 18년간 MBC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정의롭고 인간미 넘치는 박영한 형사반장을 880회에 걸쳐 연기하며 당대 아버지와 서민의 얼굴을 표현했다. 극 중 형사들의 활약으로 경찰의 이미지가 크게 개선되자 1972년에는 명예 경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최불암은 역할에 대한 책임감이 남달랐던 배우였다. '수사반장'을 촬영할 당시 "사회를 계도하는 큰어른 역할의 연기자가 매번 술에 취해 비틀거릴 수는 없다"며 한동안 술을 끊기도 했을 정도였다.

최불암이 '한국 아버지의 전형'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은 1980년부터 2002년까지 22년간 방영된 MBC 드라마 '전원일기'에서였다. 양촌리 김 회장 역을 맡은 그는 마을 공동체의 중심을 지키는 어른이자 대가족을 지탱하는 가장의 모습을 연기했다. 가문의 질서를 중시하는 엄한 아버지이면서도 가족 구성원 한 명 한 명을 깊이 아끼는 캐릭터에서 많은 시청자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냈다. 고개를 젖히며 파안대소하는 그의 웃음은 이 시기에 탄생했으며, 이는 그의 상징이 되었다. 1990년대에는 그의 이름을 내세운 유머 '최불암 시리즈'가 유행하면서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도 자리 잡았다. 최불암은 1998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각박한 세상에서 곧 멸종될 것 같은 김 회장의 순박한 캐릭터가 어리숙한 '최불암 시리즈'를 낳은 것 같다"며 "광대의 한 사람으로서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무대 밖에서도 최불암은 선한 영향력을 꾸준히 펼쳤다. 1981년 '전원일기' 촬영장에서 아역 배우들과 맺은 인연을 계기로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후원을 시작했으며, 1985년부터는 전국후원회장으로 활동하며 45년 동안 가장 낮은 곳에서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재단 측은 "연예계에 결연 후원 문화를 정착시킨 대표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생전 주변인들에게 남긴 최불암의 뜻에 따라 운구 행렬은 장지로 떠나기 전 서울 중구 초록우산 본부에 들를 예정이다. 또한 방송계의 변화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어른이기도 했다. 2005년 드라마 '달콤한 스파이'로 기자들을 만난 그는 "드라마로 쓴맛도 봐야지, 단맛만 봐서야 되겠느냐"며 "말초적인 것만 건드리면 감동이 없다"고 지적했다. 2024년 '수사반장' 프리퀄인 드라마 '수사반장 1958' 방송을 앞두고는 후배 배우들에게 "국민이 가야 할 길에 가시덤불이 있다면 그것을 먼저 치워주는 것이 바로 광대 정신"이라며 "사회 비리를 고발하는 데에 힘을 보태고 좋은 일은 따르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최불암이 오랜 세월 사랑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젊은 시절의 고통도 자양분이 되었다. 그는 주인공을 맡았던 한 연극에서 혹평을 받으며 연기를 포기하고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 지독한 무력감과 우울감에 빠져 한때 자살까지 생각했다. 자신을 건진 것은 "세상의 떡이 다 네 떡인 줄 아느냐?"는 한 목사의 호통과 안중근 의사의 휘호 '인무원려 난성대업(사람이 멀리 내다보며 헤아리지 않으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이었다고 밝혔다. 생전 그는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 등 뒤의 창문을 열어봐라. 행복이란 놈이 거기 있을 거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최불암의 빈소에는 연예계 후배들의 애도 발길이 이어졌다. '전원일기'에서 부부로 호흡을 맞췄던 배우 김혜자는 "저는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죽으면 또 만날 거고"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배우 나문희는 "우리의 자랑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가서 마음 한구석이 많이 섭섭하다"고 했고, '그대 그리고 나'에서 아들 역을 맡았던 차인표는 "우리나라가 어렵던 시절부터 국민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추도했다. 정부는 최불암의 공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우리 시대의 아버지로 오랜 세월 국민 곁을 지켜주신 선생님을 기억하겠다"고 밝혔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민자와 아들 동녘, 딸 동비가 있으며, 장례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장으로 치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