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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성 낮은 투자 강요…트럼프 청구서에 흔들리는 한국 협상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 투자 규모 발표로 촉발된 한미 협상 논란이 국내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사업성이 낮다고 판단된 알래스카 LNG 사업이 전략적 가치를 이유로 재추진되는 가운데, 정부는 명확한 거부 조건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로 투자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백악관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한 한국의 미국 투자 계획이 국내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텍사스 가스화력발전소 220억달러, 대형 원전 8기 1200억달러,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사업 500억달러 등 총 2000억달러대의 투자 규모가 공개되면서 협상의 실체와 한국의 협상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발표 이후 열흘이 지난 현재까지도 정부는 투자 여부와 규모를 명확히 하지 못하고 있으며, 국회에서는 협상 과정의 투명성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와 미국 간의 합의 내용과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원전 사업의 경우 한국형 APR1400 2기와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AP1000 6기 등 8기 건설을 위한 협력체계에 양국이 합의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사업 추진의 틀에 합의한 것일 뿐 개별 원전의 투자와 건설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알래스카 LNG 사업이다. 한미 공동 팩트시트에는 상업적 합리성과 국내법 요건 충족을 전제로 사업 검토에 착수한다는 취지만 명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것처럼 발표했으며, 미국 측이 제시한 사업비도 670억달러에서 540억달러, 500억달러로 계속 변경되었다.

국회에서 제기된 비공개 보고 녹취 유출 논란도 협상의 신뢰성을 훼손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22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와 재정경제위원회에 대미투자 현안을 비공개로 보고하면서 텍사스 가스발전소를 1호 사업으로 추진하고, 원전과 알래스카 LNG는 아직 추진 의사를 결정하지 않은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회의 직후 보고 내용이 언론에 유출되었고, 일주일 뒤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에서는 미정이었던 사업들이 투자 계획으로 변모했다. 야당은 정부가 미국과 투자 규모를 협의해놓고도 국회에는 검토 단계라고 설명한 것 아니냐며 협상 전모를 밝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미국의 발표를 사전에 인지했는지, 협상 과정에서 어디까지 동의했는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업성이 낮다고 판단된 알래스카 LNG 사업의 위치 변화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지난 6일 국정감사에서 알래스카 LNG에 대해 사업성이 분명히 낮아서 그동안 추진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실제로 정부는 지난해 11월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이 사업을 '하이리스크' 사업으로 분류하며 투자 대상으로 들어오기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감에서 김 장관은 중동 전쟁을 거치면서 새로운 전략적 가치가 생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략적 가치가 커졌다고 해서 건설비, 생산비, 운송비 같은 실질적인 경제 요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당 내에서도 LNG 수요가 예상보다 빨리 줄면 투자비를 회수하지 못하는 좌초자산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통상 협상의 성과로 제시된 관세 15%도 실질적인 안전판이 되지 못하고 있다. 김정관 장관은 미국이 15%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고 했지만, 합의문에 상한을 직접 명문화하지는 못했다고 인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일 한국이 합의하지 않으면 비용을 두 배로 청구하겠다고 위협했으며, 김 장관도 양해각서상 사업에서 철수하면 미국이 관세를 올리는 등 보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형식적으로는 상업적 합리성과 국내법 요건 충족을 거부 조건으로 내세울 수 있지만, 거부에 따르는 통상 부담은 불확실한 상태다. 정부는 최종 실효 관세율이 15%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이를 보장하는 명시적 상한이 합의문에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이 실제로 사업성이 부족한 투자를 거부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명확하다. 정부는 이형일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통해 미국 측의 구체적인 사업 조건을 바탕으로 경제성을 검증하고 국내 절차를 마친 뒤 투자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원전 선급금 100억달러도 상업성 검증과 국내 절차 완료가 전제라고 밝혔다. 그러나 통상업계 전문가들은 투자할 이유뿐 아니라 투자하지 않을 조건까지 확보하는 것이 이번 협상에서 한국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말 알래스카 LNG 사업의 상업적 합리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바 있으며, 미국이 이후 연방정부 관여와 기자재 관세 인하, 장기 구매계약 등 지원책을 제시하면서 다시 검토 대상에 올렸다. 이번 협상의 결과가 한국의 국익을 지켰는지, 아니면 협상 참사인지는 정부가 얼마나 명확한 거부 조건을 확보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