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뉴스나우
문화·연예

죽음을 동사로 되돌린 문학의 힘, 보부아르의 애도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은 암으로 고통받는 어머니의 마지막을 기록한 작품으로, 죽음을 명사에서 동사로 전환하는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보부아르는 죽음 앞에서도 생을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의 욕망을 증언함으로써 죽음이라는 보편적 현상을 개별적 삶의 이야기로 재구성한다.

죽음을 동사로 되돌린 문학의 힘, 보부아르의 애도
AI를 활용해 생성된 이미지입니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저작 '아주 편안한 죽음'은 단순한 죽음의 기록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보편적 현상을 개별적 삶의 이야기로 전환하는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이 책은 암으로 고통받다 결국 세상을 떠난 보부아르의 어머니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의 마지막 순간들을 기록한 작품으로, 철학자의 이성적 분석을 넘어 한 딸이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감정의 진정성을 담아낸다. 보부아르는 자신이 마주한 슬픔을 두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서 울고 있는 듯했다'고 고백하는데, 이는 죽음 앞에서 개인의 정체성이 어떻게 흔들리고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보부아르의 여러 저작을 관통하는 주제는 '죽음'이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에서는 실존주의적 관점으로, '노년'에서는 사회적 관점으로, '작별 의식'에서는 사르트르의 마지막을 기록하며 죽음을 다루었다. 그러나 '아주 편안한 죽음'은 이전의 작품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철학자이자 지성인으로서의 보부아르가 아닌, 죽음을 앞둔 어머니를 바라보는 한 딸의 목소리가 주도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진정한 울림은 개인적 상실의 기록이 갖는 보편성에 있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를 잃었거나 언젠가 잃게 될 운명을 지닌 존재들이기에, 보부아르의 경험은 단순한 공감을 넘어 독자 자신의 경험으로 재구성된다.

제목의 '아주 편안한 죽음'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불편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고통스러운 순간이 빨리 지나가는 죽음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찾아오는 죽음을 의미하는가. 어떤 해석을 내려도 이 질문은 불편함을 남긴다. 망자는 자신의 죽음을 두고 결코 '편안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부아르 자신도 죽음이란 한 개인에게 일어난 부당한 폭력이라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이유로든 죽는다. 질병이든, 사고든, 쇠락이든 우리 삶을 앗아가는 그것이 그리 다정할 리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죽음 앞에 '편안한'과 같은 수식어를 붙이려 할까. 이는 망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이 죽음을 이해하고 견디기 위한 것이 아닐까.

책 속에서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의 몸은 점점 더 훼손되어 간다. 암 진단 후 수술대에 오른 그의 몸은 부풀어 오른 배, 코에 삽입된 관, 욕창이 생긴 피부, 푸르스름한 색상, 모공에서 흘러나오는 액체로 변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수아즈는 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스러운 주사를 참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언제 퇴원할 수 있는지를 묻고, 퇴원할 수 있다고 믿으며, 약을 끝까지 삼키려 노력한다. '죽음을 미뤄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마지막 언어는 "숨이 막혀"였다. 보부아르는 이를 '숨을 쉬고 싶어'로 해석한다. 죽음 앞에서도 그는 마지막까지 살고 싶었던 것이다.

보부아르의 애도의 글쓰기는 죽음이라는 명사를 동사로 되돌려놓는 작업이다. 명사 '라 모르(죽음)'는 닫힌 결론이지만, 동사 '무리르(죽다)'는 시간과 변화를 품는다. 보부아르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보편적 문장을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가 죽어간다'는 개별적 사건으로 전환한다. 이 사건의 주체는 평생 자신의 이름으로 불려본 일이 별로 없었던 한 여자,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라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딸이 어머니의 삶을 죽음보다 더 크게 그린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에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죽음의 이야기인가, 생의 이야기인가.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어머니의 살아 있는 몸과 욕망을 증언했다는 것, 그렇게 죽음이라는 사건을 삶의 안쪽으로 끌어왔다는 것이다. 절대 편안할 수 없는 이 죽음 앞에서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생을 더 절실하게 바라보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