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반발에 CPTPP 가입 연내 신청 보류…글로벌 통상과 농업 보호 사이의 갈등
이재명 대통령이 농축산업 피해 우려로 CPTPP 가입을 연내 신청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농촌 지역의 반발과 농지 전수조사에 따른 토지 가격 하락 우려가 배경이며, 정부는 함께 7000억원 규모의 농어촌 지원책을 마련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연내 신청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농축산업 피해가 예상되는 가운데 농어촌 지역의 반발 여론이 거세지자 일단 추진에 제동을 건 것으로 풀이된다. 청와대 강유정 수석대변인은 8일 서면 브리핑을 통해 이 같은 대통령 지시 사항을 공개했으며, 정부가 11월 예정했던 CPTPP 장관회의를 계기로 한 가입 논의도 함께 미뤄지게 됐다. 이는 6일 국무회의에서 "원점에서 다시 대화하라"고 지시한 지 불과 이틀 만의 결정으로, 농촌 민심 악화에 대한 정부의 민감한 반응을 보여준다.
CPTPP는 일본, 호주, 캐나다, 싱가포르, 멕시코, 영국 등 12개국이 참여하는 다자무역협정으로, 미국이 탈퇴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모태로 2018년 출범했다. 회원국 간 관세 철폐와 서비스·투자시장 개방, 디지털 통상 등 높은 수준의 무역 자유화를 추구하는 협정이다. 미국과 중국이 모두 참여하지 않는 경제협력체로서, 미·중 통상 갈등이 심화하는 가운데 한국이 수출시장을 다변화하고 글로벌 공급망을 안정화할 수 있는 전략적 대안으로 주목받아 왔다. 정부는 지난 8월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CPTPP 가입을 위한 사회적 논의와 의견 수렴을 시작하기로 밝힌 뒤 관련 준비 작업에 속도를 내왔으며, 문재인 정부가 2021년 가입 추진 의사를 밝힌 이후 약 5년간 진전을 보지 못했던 만큼 연내 신청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그러나 농어촌 지역의 반발이 계속 커지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특히 정부의 농지 전수조사 방침과 CPTPP 가입 추진이 맞물리면서 농촌의 우려가 심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호남을 중심으로 한 여권의 지지 기반인 농촌 지역에서 토지 가격 하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이는 정부에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관계부처가 발표한 'CPTPP 가입 경제적 영향 분석' 결과에 따르면 가입 시 협정 발효 10년 뒤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미가입 때보다 0.38%포인트 높아질 것으로 전망됐다. 제조업 기반 생산 파급 효과는 발효 후 15년간 연평균 6조3000억~6조7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분석됐지만, 농림수산업 부문의 손실은 상당한 수준이다.
농림수산업 분야의 경제적 타격은 무시할 수 없는 규모다. CPTPP 가입 시 농업 7100억원, 수산업 817억원, 임업 606억원 등 농림수산업 생산이 연평균 약 8500억원 감소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제조업의 이득을 농림수산업이 일방적으로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로, 농촌 지역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부는 이 같은 손실을 인식하면서도 글로벌 통상 질서의 변화 속에서 CPTPP 가입이 전략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해 추진했지만, 농촌업계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자 가입 추진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이 대통령은 "국제 통상 질서가 빠르게 변하는 상황에서 CPTPP는 글로벌 통상 국가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이 중요하게 검토해야 할 선택지"라며 향후 재추진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열어뒀다.
정부는 CPTPP 가입 보류와 함께 농어촌 지원 대책을 동시에 발표했다. 농어촌상생협력기금 1조원 중 부족한 7000억원을 정부 재정으로 충당하겠다는 내용의 지원책이 마련된 것이다. 이는 CPTPP 가입 보류로 인한 정치적 손실을 농촌 지역에 대한 재정 지원으로 보상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결국 이번 결정은 단기적으로는 농촌 민심을 달래기 위한 선택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경제 질서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겨두게 됐다. 정부는 앞으로 농림수산업계와의 충분한 협의를 통해 개방 범위와 보호 대책을 조율한 뒤 CPTPP 가입 논의를 재개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수출 기업과 농촌 지역 간의 이해 충돌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가 핵심 과제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