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일정 취소됐지만 매일 소환되는 영화…부산영화제 '암살자(들)' 역설
역사 왜곡 논란으로 부산국제영화제의 모든 공식 일정이 취소된 영화 '암살자(들)'이 역설적으로 영화제 전역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이 되었다. 개막식 기자회견부터 심사위원 발언, 주연배우의 부재, 해외 영화제의 선택까지 곳곳에서 언급되며 물리적 부재가 오히려 존재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역사 왜곡 논란으로 부산국제영화제의 모든 공식 일정이 취소된 영화 '암살자(들)'이 역설적으로 영화제 전역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이 되었다. 개막식 레드카펫, 야외 무대인사, 주연배우 현장 출석 등 예정된 행사가 전부 무산되면서 물리적으로는 영화제에서 사라졌지만, 정작 개막 이후 영화제 안팎의 관심을 독점하며 연일 언급되고 있는 상황이다. 제작진이 배우와 관객의 안전을 고려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이는 오히려 작품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영화제 첫 공식 기자회견부터 '암살자(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난 6일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개막작 '낮과 밤은 서로에게'의 기자회견에서 '암살자(들)'에 특별출연한 배우 심은경에게 관련 질문이 제기되자, 모더레이터는 "이 자리는 개막작에 대한 기자회견"이라며 질문을 제지했다. 하지만 영화제 첫 공식 기자회견부터 논란의 영화가 소환된 것 자체가 그 파장의 크기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튿날 열린 경쟁부문 심사위원 기자회견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심사위원들은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창작의 자유와 책임의 경계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이는 '암살자(들)'을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장이머우 감독은 '암살자(들)'을 보지 못했다고 밝히면서도 창작의 자유에 대한 입장을 드러냈다. 그는 "역사적 진실과 창작의 관계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표현하거나 짧은 시간 안에 해답을 찾기 어렵다"며 "창작은 창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를 보고 관객이 느끼는 바는 다 다를 수 있고 다른 관객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자체가 영화의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정주리 감독은 보다 구체적인 고민을 드러냈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작품을 만들어온 그는 "영화로 만들어지면 결국 허구의 이야기이고 허구의 인물들이 된다"면서도 "지금 제가 느끼는 건 제 영화도 아닌데 위축이 된다"고 토로했다. 동시에 그는 "당연히 그 상처가 표현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도 한다"며 작품으로 상처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주연배우 유해진의 부산 불참도 논란을 더욱 부각시켰다. 지난 7일 열린 제35회 부일영화상 시상식에서 유해진은 '암살자(들)'과 무관한 작품 '왕과 사는 남자'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암살자(들)' 논란 이후 부산 일정을 전면 취소하면서 제작사 대표가 대신 트로피를 받은 것이다. 배우의 빈자리는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가 되어 영화제 전역에 울려 퍼졌다.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 109명이 영화를 개막작으로 선정한 제37회 싱가포르국제영화제에 선정 철회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영화제 측은 "'암살자(들)' 제작진의 창작적 비전을 존중한다"며 개막작 선정을 유지했다. 영화제 측은 "독립적인 프로그래밍 과정을 통해 작품을 선정했으며, 관객들이 다양한 이야기와 관점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SGIFF의 역할"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암살자(들)'은 1974년 8월 15일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다. 개봉 이후 역사적 사건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방식과 표현을 둘러싸고 역사 왜곡 논란이 불거졌고, 정치권까지 가세하면서 파장이 확대되었다. 제작진은 특정 인물을 사건의 배후로 규정하거나 극중 가설을 역사적 사실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결국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암살자(들)'을 직접 만날 공식 일정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막작 기자회견부터 심사위원들의 발언, 주연배우의 빈자리, 해외 영화제의 선택까지 곳곳에서 작품의 이름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스크린에서는 사라졌지만 화제의 중심에는 남아 있는 것이다. 공식 일정은 '0'이지만 가장 자주 이름이 불리는 영화, 가장 보기 힘들면서도 가장 주목받는 영화가 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