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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타이어 신발로 뛴 마라토너, 한국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 안기다

1954년 필리핀 마닐라 아시안게임에서 최윤칠이 육상 남자 1500m에서 3분56초2의 당시 아시아 최고 기록으로 우승해 한국 아시안게임 역사의 첫 금메달을 안겼다. 마라톤 선수였던 그는 폐타이어가 덧대어진 신발을 신고 국제무대에서 활약했으며, 올림픽에서는 메달을 놓쳤으나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의 정상에 올랐다.

1954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안게임. 한국은 광복 이후 처음 국제종합대회에 참가했고, 개막 이튿날 역사적인 첫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그 주인공은 마라토너 최윤칠이었다. 육상 남자 1500m 결승에서 3분56초2의 당시 아시아 최고 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최윤칠은 이후 한국 아시안게임 역사의 첫 장을 장식하는 선수가 됐다. 그가 신은 신발의 밑창에는 폐타이어가 덧대어져 있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제대로 된 장비조차 갖추지 못한 채 국제무대에 선 한국 선수단의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최윤칠은 1928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달리기 재능을 드러냈다. 양정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1912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남승룡이 다니던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했다. 두 선배는 훗날 최윤칠의 코치가 되어 그의 마라톤 인생을 이끌었다. 당시 훈련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최윤칠이 신은 신발은 싸구려 가죽에 자동차 타이어를 덧대고 못을 박은 수제 신발이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기회를 얻게 됐다.

1948년 런던올림픽은 광복 이후 한국이 처음 태극기를 달고 나선 올림픽이었다. 최윤칠은 마라톤에서 38㎞까지 홀로 앞서 달렸고 금메달이 눈앞에 보였다. 그러나 남승룡 코치의 지시에 따라 2시간 이상 물을 마시지 않은 그는 결승선을 3㎞ 앞두고 탈수와 경련으로 쓰러졌다. 2년 뒤 1950년 보스턴마라톤에서는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동료 선수들의 페이스메이커를 자청했다. 초반부터 앞서 달리며 외국 선수들의 체력을 빼는 역할을 맡은 그는 결국 3위로 들어왔고, 함기용과 송길윤이 1·2위를 차지하며 한국 선수들이 1~3위를 휩쓸었다. 손기정 코치는 훗날 "함기용, 송길윤의 1·2위보다 최윤칠의 3위가 더 값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6·25전쟁 중 열린 1952년 헬싱키올림픽 마라톤에서 최윤칠은 4위에 그쳤고, 동메달과의 차이는 단 29초였다. 올림픽 메달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은 최윤칠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한국이 처음 참가한 아시안게임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대회에 마라톤 종목이 없었던 것이다. 42.195㎞의 마라톤에서 체력을 배분하며 달려온 선수는 갑자기 1500m, 즉 자신이 달려온 거리의 28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거리에서 몇 분 안에 승부를 내야 했다. 이는 완전히 다른 경기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최윤칠은 3분56초2의 당시 아시아 최고 기록으로 1500m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통틀어 국제종합대회에서 나온 첫 금메달이었다. 그는 5000m에서도 은메달을 추가하며 한국 육상의 저력을 세계에 알렸다.

최윤칠의 이름에는 할아버지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세상의 꼭대기에 일곱 번 오르라는 의미였다. 그는 올림픽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아시안게임에서는 한국 선수 가운데 가장 먼저 정상에 섰다. 1954년 마닐라에서 최윤칠이 딴 금메달은 한국 아시안게임 역사의 시작이 됐고, 이후 수십 년간 한국이 아시안게임에서 따낸 수많은 금메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최윤칠은 2020년 10월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한국의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리스트라는 이름은 영구히 남았다. 현재 나고야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서도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이 금빛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들의 뒤에는 폐타이어 신발을 신고 첫 발을 내디딘 한 마라토너의 정신이 함께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