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로시간 규제까지 풀며 반도체 산업 유치 전력
일본이 반도체 산업 유치를 위해 월 45시간으로 제한해온 근로자 잔업 시간을 풀기로 결정했다. 행정·재정 지원에 이어 노동 규제까지 완화하며 글로벌 반도체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는 전략인데, 한국은 주 52시간제 완화 논의가 답보 상태다.

일본이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동 규제까지 대폭 완화하기로 결정했다. 2018년부터 월 45시간으로 제한해온 근로자 잔업 시간을 내달부터 자유롭게 풀기로 한 것이다. 이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일본이 행정, 재정, 제도 전반에 걸쳐 얼마나 공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 규슈섬의 구마모토는 이러한 정책 변화의 중심지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의 구마모토 1공장은 입지 발표부터 완공까지 단 3년 만에 준공됐으며, 실제 건설 기간은 2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현재 건설 중인 2공장까지 포함한 TSMC의 총투자액은 약 3조 엔(약 26조 원) 규모인데, 일본 정부가 이 중 약 40%에 해당하는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전폭적인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초고속 추진이다.
미국 마이크론도 일본 본섬 히로시마에서 공장 증설 기공식을 개최했다. 마이크론이 2013년 일본의 엘피다를 인수하면서 확보한 메모리 반도체 생산라인을 확대하는 것인데, 투자액 1조5000억 엔 중 3분의 1 이상을 일본 정부가 부담한다. 2021년 이후 해외 반도체 기업의 대일 투자액만 해도 6조 엔에 달한다. 일본은 원래도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세계 최강국이었는데, 이제 파격적인 보조금과 행정적 지원을 통해 이 생태계를 더욱 탄탄하게 구축하고 있다. 이는 추가 공장 유치와 기존 설비 증설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낸다.
일본이 이번에 근로시간 규제를 풀기로 한 이유는 명확하다. 인공지능 반도체 호황 속에서 국가 경쟁력을 최대한 확보하려면 '속도 경쟁'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첨단 반도체 장비를 설치하고, 그 장비를 최적화해 불량률을 낮추고, 고객사에 적기 납품하는 과정에서 핵심 인력들의 집중 근무는 필수적이다. 지금까지 후생노동성의 강한 요구로 인해 대부분 현장에서 월 45시간 잔업 규제가 실질적으로 적용되어 왔지만, 이 장벽이 대폭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노사 합의 시 월 100시간 잔업도 가능했지만, 행정 지도로 인해 제약이 있었던 상황이 개선되는 셈이다.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 분야의 근로 유연성 확대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반도체 산업의 R&D 인력은 집중력과 지속성이 생산성을 좌우하는 분야인데, 근로시간 규제 완화는 이들의 집중 근무 환경을 대폭 개선할 수 있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은 이미 화이트칼라 이그젬션(고급 전문직 근로시간 면제) 제도 등을 통해 이를 보장하고 있다. 일본의 이번 결정은 이러한 제도적 유연성을 더욱 강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한국의 상황은 대조적이다. 대만 TSMC나 미국 마이크론이 한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 검토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 반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이나 일본에서 신규 공장 건설을 추진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국내 투자 환경이 상대적으로 가혹하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은 10년 가까이 '주 52시간제 완화'를 외쳐왔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현재 도입된 '탄력적 근로시간제'와 '선택적 근로시간제'도 근로시간 정산 주기가 짧아 현장 활용도가 미미한 수준이다. 반도체 산업 인력, 특히 R&D 인력을 대상으로 한 근로시간 유연화 제도는 거의 전무한 상태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과 관련해 '일본 구마모토 못지않은 속도로 신속하게 집행'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단순히 부지를 마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정부가 반도체 산업 지원에 진정성이 있다면, 호남 지역 메가특구특별법에 주 52시간제 규제 완화 내용을 우선 담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를 경기 용인, 이천, 평택 등 다른 반도체 클러스터에도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 반도체 경쟁에서 앞서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국도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다. 경쟁국들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