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규제 리스크 선제 대응, 한국 반도체 기업의 중국산 장비 탈피 가속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의 대중국 규제 강화에 대비해 중국 국유 자본 영향권의 맷슨테크놀로지 장비를 한국·미국 제품으로 대체하는 공급망 재편을 추진 중이다. 이는 글로벌 반도체 장비 시장의 판도 변화와 국내 장비산업의 성장 기회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의 대중국 규제 강화에 대비하기 위해 중국산 반도체 장비 의존도를 줄이는 공급망 재편에 본격 나섰다. 중국 국유 자본의 영향권에 있는 맷슨테크놀로지의 장비를 한국과 미국 등 다른 국가 제품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미·중 갈등이 국내 반도체 산업의 구조까지 변화시키는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물결이 한국 기업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현재 신규 생산라인 구축 시 맷슨 장비 도입 비중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있다. 감광액 찌꺼기를 제거하는 포토레지스트(PR) 스트립 장비와 웨이퍼에 고온을 가하는 급속열처리장치(RTP) 등이 대체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 두 장비는 맷슨이 높은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이며, 지금까지 삼성과 SK하이닉스의 기존 생산라인에도 다수 도입되어 운영 중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신규 라인에는 맷슨 장비를 대체할 공급사를 검토하고 있으며, 이미 국내외 PR 스트립 장비 및 RTP 업체들과 공급 방안을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한국 기업들이 맷슨 장비 대체에 나선 배경은 미국 규제의 불확실성에 있다. 맷슨은 원래 미국 반도체 장비 업체였으나 2016년 중국 자본에 인수되어 베이징 E-타운 반도체 테크놀로지(이타운) 계열사로 편입되었다. 이타운은 중국 베이징시 산하의 국유 투자회사로, 현재 맷슨은 사실상 중국 국유 자본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 아직 미국 상무부의 거래제한목록(Entity List)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향후 규제 대상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판단이 한국 기업들의 선제 대응을 촉발했다. 거래제한목록에 오른 기업의 장비나 기술이 공급망에 포함될 경우 미국 수출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미 선제 대응을 시작한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TSMC는 지난해 2나노미터 등 첨단 반도체 제조에 맷슨과 중웨이반도체(AMEC) 장비를 배제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의 중국산 장비 규제 강화 가능성을 고려하여 생산 차질 요인을 사전에 제거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최근 신규 장비 도입에서 맷슨 비중을 줄이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표면적으로는 경쟁사 대비 성능과 가격 경쟁력이 다소 떨어졌다는 평가가 있지만, 업계에서는 미국 규제 리스크를 고려한 전략적 결정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공급망 재편은 장비 분야를 넘어 부품 영역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부품을 공급하는 업체들이 중국 반도체 제조사에는 같은 제품을 최대한 공유하지 말라는 요청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공정용 소모품을 양사에 공급하는 한 부품업체 대표는 "미국이나 대만 반도체 업체와의 거래는 크게 문제 삼지 않지만, 중국 제조사와의 협력은 가급적 신중하게 가져가 달라는 요청을 구두로 받았다"며 "과거에는 기술 유출을 우려했다면 최근에는 공급망 리스크 관리에 더 무게를 두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이는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단순한 기술 보호를 넘어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고려하여 공급망을 재구성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탈중국 움직임은 글로벌 반도체 장비 시장의 판도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ASML, 램리서치, 도쿄일렉트론(TEL), KLA 등 전통적인 글로벌 장비 5대 기업과 국내 장비사들이 수혜를 입을 전망이다. 한 반도체 장비업체 대표는 "맷슨 장비를 대체하려는 수요를 노리고 글로벌 기업과 한국 기업 간 경쟁이 시작됐으며, 일부 신규 장비는 국산화까지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미·중 갈등으로 촉발된 한국 반도체 기업의 공급망 재편은 국내 장비 산업의 성장 기회로 작용할 수 있으며, 동시에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의 구조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